… 비오는 오후의 운율을 듣다.
5월공연 준비를 위해 대구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다. 억수같은 빗길에 누적된 피로로 인하여 몇 번 죽음의 문턱에서 쉽지 않은 방황을 하였다.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노를 연상케 하는 빗소리. 방황이라. 그래 그 상황을 방황이라 표현하고 나니, 너무 이이러닉하다. 아주 섬세한 메조 포르테. 봄이라서 그런지 초록이 날카롭게 무거운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아주 차분히
… 비오는 날이 생일이라는 한 청년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서울기점 400km. 아마 여기서 일백여 킬로만 가면 우리의 목적지가 있고, 투쟁적으로 우리는 그 곳에 가야만 한다. 그런데 어쩜 대한민국의 도로는? 파헤칠 곳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여기 저기 생채기투성이인 검은 피부의 여인이 황사의 흙비 아래서 끝없이 기다랗다 젖고 있다. 난 측은한 듯 그녀의 몸에 난 음습하고 인위적인 상처를 피해 목적지를 향한 피곤한 드라이브를 한다. 쉽지 않게 도착한 공연장. 이번에 공연해야할 장소는 그 규모가 터무니없이 작다. 공연장과 객석에 관한 정보를 고스란히 디지털 카메라에 옮겨 놓았다. 아무리 구상을 해보아도 이건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 밖에는 안 나온다.
내려오는 길의 폭우는 기온의 숨통과 함께 고요해진 듯하다. … 그러면서
경부선 고속도변 어디 쯤...에.선.가, 아아! 건천휴게소다. 핸드폰이 날아온다. 송시내 선배다......지난 겨울의 구상이 늙은 조랑말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다가온다.
마지막 장면을 위한 사랑의 夢想과 絶望에 대한 記錄
연출의 변
1. 누구나 위험한 사랑을 한다.
격정을 위해 체온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에는 이미 안정권이 없음을 인정한 그들의 거친 살결. 때때로 생물의 감정은 물질이 지닌 가치보다 못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육체란 기억의 경계 밖에서는 존재 자체가 더욱 모호해지는 법. 구지 사랑愛 옷을 입힐 필요가 있었을까. 커튼을 열면 (E)몰아치는 바람. 거세지는 격정.
2. 머무는 곳 마다 안개 숲 어디쯤이다.
사람이 빠져나가면 그 것을 입었던 사람의 체온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 옷가지들은 고요하다. 아. 가엾고 뼈져린 몽상. 하지만 이 고요를 마주앉아 있다는 것은 짙은 보라색 커튼을 열고 (M)건조하고도 우울한 멜로디를 맞이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L)아름답고 우아한 포즈로 가라앉은 불빛. 살아있는 사람의 형상처럼 흩어진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어 놓으며 복도 끝으로, 이 때의 고독은 맑고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복도 끝으로 열려진 커튼을 닫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오로지 살아있다는 것을 위한 엘레강뜨. 움직임 없이 그 옆에 잠시 선다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3. 화원으로부터 바람이 부는군요.
‘이 풍경은 누구를 위해 준비한 것인가요.’ 소리만큼이나 우울하게 들어온 바람이 카우치에 눕는다. 고도로 절제된 19세기의 고전적인 수법으로, 무의미하면서도 탁한 거실의 질서를 넘나드는 시선. 오직 이 것 밖에는 살아서 기억되는 것이 없으리라. 아니, 보이는 것들은 (E)새벽 종소리를 동반한 소리의 무력武力으로 이미 영역에서 벌써부터 밀리기 시작했고 멜랑콜릭한 기억의 교회당 양철 지붕위에선 (L)고딕으로 응고된 달빛이 허리를 길게 펴서 휘파람을 날린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춤을 추기 위한 안개의 신호. 화원으로부터 발신되는 안개의 전문電文이다.
4. 다시 커튼이 열리면
투명한 꽃들의 관. 혹은, 꽃들을 위한 투명한 관. 그대의 가장 솔직한 페르소나? 그리고 또. 아름답지만 무미한, 고딕으로 각이 진 안개의 일부에 자신을 기꺼이 매각한 사내의 오롯한 꿈.
을 꾼다. 절실한 무대언어를 만들기 위해 함께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겨울과 봄의 창백한 가지 사이에서, 눈을 뜬다. '지독히도 가난했었던 겨우 내내 어둡고 짙은 보라색 커튼 뒤에서 벌어질 일들을 몽상하며 노르웨이식 절망의 외투를 준비했었지.' 관습이 되어버린 부부. 자동인식으로 입력되어있지 않으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지금 황무지의 노마드nomad를 상상한다. 19세기도아니고 21세기도 아닌 이 어정쩡한 세기의 보헤미안, 그들 디지털식 사랑의 빙점氷點을 향해,
… 건천휴게소다. 그 흔한 커피도 한 잔 마시지 않고 곤하게 잠들었었던 곳이, 바로.
핸드폰이 날아온다. 송시내 선배다. 얼른 집에 가서 이러저러한 곳에 이모저모한 이유로 무언가를 써 달라 한다. 어둠 속에서 과적한 트럭이 그 소리마저 웅장하게 지나간다. 그 뒤를 오피러스 승용차가 여유만만하게 뒤따른다. 저잣거리 어느 투전판에서 짧은 판돈으로 재미를 좀 보고 자신의 허술한 초가로 향하고 있는 얼큰한 마부 같다. 덩달아 지난 겨울의 구상이 늙은 조랑말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사라진다. 더운 콧김을 실룩거리며.
…혹, 낮에 느꼈던 소리의 정체가 피아노 소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어느새 말발굽소리가 요란하다. 뭐 그냥 촌스럽지 않게 리벌버 처리된 암말이나 숫말의 저녁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피부가 검은 여자 이제는 울산을 향해 다리를 길게 늘이고 있다. 건조하지 않을 정도의 적막함. 대단히 관능적인 밤이다.
"생일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