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화가 박종민

대숲에 바람이 인다.

사그락 사그락 댓잎은 사운대기도 하고, 한쪽으로 몰려가며 쏴아 하니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벌써 가을은 익어가고 대숲은 겨울을 불러오고 있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는 언제나 듣기에 좋다.

봄에는 시와 소설에 탐닉했고, 여름에는 역사서(史書)를 즐겼는데, 가을이 깊어가니 냉정하고 침착하게 철학서(書)를 당겨 놓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대숲의 바람소리에 귀는 젖었다. 청량하기도 하고 무섭게 칭얼대기도 하는, 때로는 대숲 머리를 흔들어대는 바람도 친가에서 보며 자랐다.

아직도 친가의 대숲은 더 푸르게 더 짙은 숲으로 청정하지만, 그 시절 나를 안아주던 부모님도, 조부님도, 고모들도 다 안계시니 어쩌다 오면 친가는 남의 집 같아 그만 나그네가 되고 만다.

늦은 가을밤 올빼미, 부엉이가 울어대도 무섭지 않던 시절, 언제나 부모님은 태산이었고 인생이 한 뭉치 설움 덩어리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가을은 깊어가고 날씨는 차갑다.

임어당의 글을 읽으며 가슴은 차분하고 냉정하게, 인생에 품격이란 것을 생각한다.

품격이라는 것은 하룻밤 사이에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술의 향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조용한 마음으로 버티고 서서 오랜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사람의 격조는 더해지지 않는다.

고매한 품격을 이루는 데는 많은 인내, 서책 가운데서 때로는 훌륭한 벗과의 청담(淸談)을 나눔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학의 벗과 정담(情談)을 나누는 것은 희귀한 책을 읽을 때와 같다. 시문을 아는 벗과의 정담은 우수한 시를 읽는 것과도 같고, 근엄한 벗과의 정담은 성현의 경전을 대할 때와도 같고, 지기(志氣)에 찬 벗과의 정담은 소설이나 전기를 읽을 때처럼 흥미롭다. 이럴 때의 벗은 남녀를 묻지 않으며 연장 연소를 논하지 않는다.

나날이 만나도 서로 안부와 세월 가는 이야기만 나누는 벗은 건들바람처럼 그냥 지나갈 따름이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벗이 몇몇은 있다.

무릇 마음의 벗이란 백리를 사이에 두고 있어도 절대로 서로 믿으며 자기를 악평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중국의 루쉰과 임어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루쉰이 비록 임어당을 배신했을지 몰라도 임어당은 전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중국이 공산화한 후 루쉰은 신중국 건설의 성인으로 추앙받지만, 임어당은 ‘반동작가’로 몰려 죽을 때까지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루쉰의 작품들은 대만에서 금서가 되었고, 임어당의 책은 대륙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임어당의 진가는 해외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1935년 처음 출간한 영문 저서 ‘나의 조국, 나의 겨레’가 호평을 받은 데 이어 1937년에 나온 ‘생활의 예술’은 미국의 특별 추천도서로 선정되면서 전미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52주 동안

▲ 한분옥 수필가 울산예총 회장

지켰다. 1975년 80세의 나이에 그는 ‘경화연운’이란 작품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그가 쓴 ‘개명 영문독본’ 등 영어학습서는 1930년대 중국 영어학습지 시장의 필독서였으며, 1966년 71세의 고령에 편찬하기 시작해 1972년 10월 내놓은 ‘현대중영사전’은 당대 최고의 중영사전으로 꼽힌다.

루쉰의 문학이 사내 마음에 나이 먹은 미녀를 연상시킨다면 임어당의 문학은 황량한 사막에서 만나는 멋진 처녀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가을은 깊어가고 날씨는 차갑다. 대숲에 바람이 쏴아하고 불어온다.

한분옥 수필가 울산예총 회장